
다시, 맑스를 교차점으로: 맑스코뮤날레 2.0을 둘러싼 몇 가지 상상
한번 더, 맑스를 호명하다
‘맑스(마르크스)’, 혹은 ’맑스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누군가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비판이론으로서 맑스주의를 호명하고, 또 누군가는 정치적 실천에 있어 여전히 유효한 사상적 도구로서 맑스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특히 뿌리 깊은 반공주의의 유산을 여전히 떠안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연구나 이론적 논의에 있어서도,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도 맑스주의에 대한 공론장은 극히 좁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 속, 2003년 출범하여 올 2026년 23년 간의 여정을 마치고 해산한 맑스코뮤날레는 맑스를 통해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 세계를 들여다보는 흔치 않은 진보·좌파 학술문화연대체의 역할을 해 왔다.
맑스코뮤날레 2.0 준비모임은 올해 맑스코뮤날레의 해산 이후 기존 맑스코뮤날레가 축적해 온 연구와 논의, 공동체적 실천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현재의 조건에서 어떻게 계승하고 갱신할 것인지 논의하기 위해 구성된 학술적 준비모임이다.1 지난 8월 22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다시, 맑스를 교차점으로: 비판적 연구자들의 코뮤날레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맑스코뮤날레 2.0 준비모임 창립대회를 개최하며 첫 활동을 시작하였다.

맑스코뮤날레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의 다양한 맑스주의 연구자 및 비판적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문제의식과 연구를 교류할 수 있었던 드문 학술적 공론장이었다. 서로 다른 관심과 연구주제, 세대와 실천의 위치에 놓여 있던 연구자들은 ’맑스’라는 하나의 교차점을 매개로 만나 각자의 질문을 공유하고, 때로는 서로 다른 입장과 문제의식을 충돌시키며 새로운 연구와 논의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물론 맑스코뮤날레 역시 그 과정에서 여러 한계와 과제를 남겼다. 변화하는 연구 환경 속에서 학술운동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가,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그 경험과 문제의식을 이어갈 수 있는가라는 과제 역시 충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았다. 그리고 2026년, 맑스코뮤날레는 그 역사적 활동을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마무리하고 해산하였다. 그렇다면 맑스코뮤날레의 해산은 무엇을 남겼는가. 지난 20여 년 동안 ’맑스’라는 이름 아래 축적되어 온 연구와 경험,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관계와 지적 자산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맑스코뮤날레 2.0은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맑스코뮤날레는 왜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가
맑스코뮤날레는 왜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가. 왜 굳이 맑스코뮤날레여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날의 연구 환경과 학술운동이 놓여 있는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연구공동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연구모임과 스터디, 학회와 프로젝트가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있으며, 각자의 문제의식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장 역시 이전보다 다양해졌다. 연구자들은 자신의 관심과 문제의식에 따라 보다 세분화된 영역에서 연구를 지속하고, 그에 상응하는 공동체와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화와 분화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연구자들이 각자의 연구모임, 학회,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학술적 교류가 특정 집단과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각 공동체 내부의 관계는 공고해지는 반면, 다른 연구공동체와의 접촉과 교류는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 연구자들이 서로 다른 조직에 분산되어 활동할수록 공동의 문제를 논의할 횡단적 접점 역시 줄어들 수 있다.
학술적 교류가 개별 조직과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면 문제는 단순한 교류의 부족을 넘어 학술운동의 형성 조건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학술운동은 개별 연구자의 성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연구와 문제의식이 만나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논쟁과 의제가 형성되고, 이를 통해 공동의 문제의식과 지적 자원이 축적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각자의 조직과 관계망을 중심으로 활동할수록 학술적 자원과 관계는 특정 집단에 더욱 집중될 수 있다. 그 결과 집단 간 이동과 교차가 어려워지고, 서로 다른 연구공동체를 연결하며 공동의 논쟁을 형성해야 할 학술적 공론장 역시 약화될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추가하는 일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연구공동체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연결될 수 있도록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횡단적 접점을 형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맑스코뮤날레 2.0이 지향하는 것은 이러한 공통의 장이다. 하나의 노선이나 하나의 연구방법론 아래 연구자들을 결집시키는 조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연구와 실천이 만나고 교차할 수 있도록 연결하고 매개하는 공동체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때 맑스는 비로소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교차점이 된다.
맑스를 교차점으로
맑스주의가 이러한 교차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은 결국 ’총체성’을 어떻게 사유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된다. 맑스주의의 강점은 개별 영역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사회적 모순과 현상들이 어떠한 생산관계와 사회적 총체성 속에서 형성되고 접속하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자본 역시 하나의 실체적 적대자라기보다 사회적 관계이면서, 서로 다른 사회적 모순들을 관통하고 연결하는 추상적 구조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총체성을 사유하는 힘은 동시에 위험을 품고 있다. 모든 차이를 하나의 설명체계 안으로 환원하고, 다른 목소리와 문제를 자신의 언어 안으로 흡수해버릴 위험이다. 맑스주의가 강력한 언어인 만큼, 그 언어가 다른 사유를 침묵시키는 순간 맑스주의 역시 자신의 비판적 가능성을 잃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맑스주의는 여러 담론 위에 놓이는 ’상위 이론’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문제들이 자신의 고유한 맥락을 유지하면서도 서로의 관계를 드러내며 만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교차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맑스코뮤날레가 지향해야 할 맑스주의는 ’대로’가 아니라 ’교차로’에 가깝다. 맑스를 중심에 세우고 그 주변에 모든 것을 정렬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를 경유하여 서로 다른 연구와 실천이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오히려 맑스주의 자체가 질문받는 구조이다.
맑스를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이 만나고, 맑스주의와 거리가 있던 연구와 실천 역시 맑스를 경유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맑스코뮤날레에서 중요한 것은 연구를 많이 모으는 것 자체가 아니라 ’연구와 연구 사이에 무엇이 발생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연구자를 지속시키는 공동체
이러한 교차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연구와 학술운동을 지속시키는 조건에 대한 논의 역시 필요하다. 학술운동의 지속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논문과 연구성과, 학회와 조직의 존속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학술운동의 지속을 연구의 생산과 성과의 축적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연구자가 하나의 사회적·지적 존재로 형성되고, 연구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조건 역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연구는 연구자라는 존재를 통해 생산되며, 따라서 연구의 지속은 연구자의 지속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구자의 소진과 이탈을 개인의 회복탄력성이나 자기관리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순간, 연구자를 형성하고 지속시키는 사회적 조건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연구는 단독자가 홀로 수행하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연구자가 연구자로서 형성되고 지속되는 과정은 개인의 의지나 역량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연구자에게는 연구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뿐만 아니라 자신의 질문을 이야기할 동료, 다른 세대의 연구자를 만날 기회, 비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 실패하거나 잠시 멈출 수 있는 (자기돌봄이 재-생산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연구자는 결코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연구공동체는 연구성과를 생산하는 조직인 동시에 연구자라는 존재가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연구자는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 관계맺는 법을 배우고, 비판하고 비판받는 법을 익히며, 연구의 권위와 책임이 무엇인지 경험한다. 따라서 연구공동체의 재생산은 연구를 재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연구할 수 있는 사람을 재생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맑스코뮤날레 2.0은 이 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반성폭력과 차별, 갈등조정과 같은 제도적 장치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제도를 갖추는 것만으로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세대와 배경의 연구자들이 만나고, 학술적 권위와 친밀성이 적절한 긴장 속에서 공존하며, 새로운 연구자가 자신의 질문을 가지고 진입할 수 있는 관계의 장을 형성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학술운동은 텍스트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어질 때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 평소에는 각자의 연구실과 작업실, 작은 연구모임과 활동의 현장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일정한 주기로 한자리에 모여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발견하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공동의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
그곳에서는 오래된 연구가 새로운 질문을 만나고, 새로운 연구가 오래된 논쟁을 다시 호출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질문을 흔들 수 있어야 한다. 특정한 세대가 소유하는 조직도, 특정한 노선을 재생산하는 조직도 아닌, 연구와 연구가 교차하고 학문과 실천이 서로를 자극하는 열린 공통장이 필요하다. 맑스코뮤날레 2.0이 지향하는 장소는 바로 이러한 공통장이다.
물론 이것은 준비모임만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맑스코뮤날레의 의미는 준비모임이 무엇을 선언하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연구자와 연구공동체가 이 장에 자신의 질문을 가져오고 서로의 질문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다시, 맑스를 교차점으로. 그곳에서 서로 다른 연구가 만나고, 그 교차로부터 새로운 질문이 시작될 것이다.

변예진
융합예술을 전공한 뒤 갤러리 큐레이터와 패션 브랜드 아트디렉터로 재직했으며, 회화를 중심으로 미술 작가 활동 중이다. 한국인 아버지와 스페인계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부터 인권 운동에 참여했다. 경계적 정체성과 디아스포라적 감각을 기반으로 작업과 실천을 이어오고 있으며, 맑스코뮤날레 사무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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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공식적으로 채택된 조직의 입장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 준비모임의 대표로서 맑스코뮤날레 2.0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의식과 기대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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