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을까? - 출교당한 신학자 변선환을 생각하며
신학자를 내쫓은 교회 권력
지난 9월 17일(목), 기독교 계통 신학교 중 하나인 감리교신학대학교(이하 ‘감신대’)에서 폭력적인 일이 벌어졌다. 과거 이 대학 학장이었던 고 변선환 학장(1927-1995)의 신학을 탐구하려던 학술 세미나가 극단적 보수 성향 일부 신학생들의 행사장 점거로 인해 무산되었다.1 변선환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하여 출교당한 이단 신학자라는 것이 이들의 이유였다. 이들의 훼방을 학교는 방관했고, 현직 교수들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변선환 학장의 삶을 기리고 그의 신학적 작업을 탐구하고자 행사를 이끌고 참여했던 또 다른 목사들과 신학생들은 결국 참담한 심정을 안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변선환이 감리교 신학의 전통 위에 있는 사람이며, 설사 그의 신학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토론의 장이어야 할 학교에서 학문적 논의조차 진행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변선환은 34년 전인 1992년, 감리교회로부터 출교당했다. 초대형 감리교회인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1937-2020)를 필두로 한 교단의 권력자들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변선환의 신학적 주장이 기독교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논리로 금란교회에서 감리교 종교재판을 열어 그를 출교시켰다. 김홍도 목사는 대표적인 극우 반공주의 목사로,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를 이끌었던 전광훈 목사의 정신적 사부이다. 1992년 교단에서 쫓겨난 변선환은 2026년 현재까지도 복권되지 못하고 있다. 논란의 인물 변선환, 그는 누구인가?
변선환은 누구인가
변선환은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양상공학교를 다니던 16살에 진남포 유사리교회 신석구 목사(1875-1950, 3.1운동 민족대표)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1948년 평양 성화신학교에 입학했다. 1951년에 월남하여 감리교신학교에 편입했고, 졸업 후 한국신학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 미국으로 건너가 드류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했으며, 1971년 스위스로 유학하여 바젤대학교 신학부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와 학장을 지냈고, 한국기독교공동학회 회장, 국제 아시아 철학종교학회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여러 종교가 병존하는 다원주의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의 위치와 역할을 진지하게 모색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바젤대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기독교와 선불교의 만남에서 본 그리스도의 궁극성 문제”이고, 1984년 『신학사상』에는 “타종교와 신학”이라는 글을 남겼다. 1990년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심포지엄에서는 “불타와 그리스도”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가 남긴 글들의 제목만 봐도 그가 타종교와의 교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개종을 전제로 타 종교인과 대화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한다고 했다가 교단 권력과 교조주의자들(신앙의 정신보다 교리를 앞세우고 절대시하는 사람들)의 큰 반발을 샀다.
토착화신학과 종교해방신학
감리교에는 토착화신학이라는 학문 전통이 있다. 토착화신학은 서구 기독교의 복음을 선교지에 사는 사람의 관점에서 말하고자 하는 신학이다. 기독교 일원적인 서구 문화권에서 신을 이해하는 것과 다종교 한국 사회에서 신을 이해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토착화 ‘신학’을 말하기 전, ‘토착화’의 쉬운 예로, 한국인은 신을 하늘에 빗대어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를 하늘이라는 뜻이 담긴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문화적으로는 국악의 형식으로 찬송을 부르고,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기도 했다.
토착화신학의 전통에 선 감리교는 유교, 불교, 무속신앙 등 다양한 종교성을 내재하고 있는 한국 민중에게 서구에서 온 기독교가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 연구해 왔다. 한국 최초의 신학자이자 정동제일교회 목사인 최병헌(1858-1927)은 예수를 한국인에게 친숙한 효(孝)에 대입해 효자로 풀이했다(“구세주 예수께서 세상에 임하사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은 성부(聖父)의 뜻을 온전히 받드신 것이니, 이야말로 천하 역사의 으뜸가는 대효(大孝)라.”).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용도(1901-1933)는 예수를 우리의 정(情)에 두어야 한다고 고백했다(“나의 앎에 주를 두고 나의 정(情), 곧 나의 사랑에 주를 두고 나의 행함에 주를 두어 그때에야 완성이다.”).


토착화신학자 윤성범(1916-1980)은 정성 성(誠)자를 성육신에 대입했다(“성(誠)은 말씀(言)이 이루어짐(成)을 의미한다. 곧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Ho logos sarks egeneto)는 성육신의 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유동식(1922-2022)은 통일신라 학자 최치원이 언급한 “풍류도(風流道)”를 기독교 신학과 연결했다(“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유유자적하는 풍류객이다. 풍류란 바람의 흐름이며 ’하느님의 활동’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러 목사, 신학자들은 20세기 초부터 꾸준히 기독교 신학의 토착화 작업을 수행했고, 변선환 역시 이러한 감리교의 토착화신학 전통 흐름에서 신학을 발전시켰다.
다른 감리교 토착화신학자들처럼 변선환 역시 서구 중심의 기독교 세계관을 벗겨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아시아에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여러 종교와 그 문화권에 사는 민중, 서구로부터 착취당해 온 아시아 민중들에게 힘이 되는 신학을 말했다. 그는 결코 “종교”로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기존 토착화신학 전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땅에 사는 민중들을 해방(구원)하는 데에 종교가 역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에는 다양한 신학적 입장이 있고, 이는 시대와 상황이 다양한 만큼 꽤 다양하게 발전해나간다. 서구종교인 기독교가 다종교사회인 동양의 식민지 조선 민중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리고 이들에게 힘이 되는 종교가 되려면 서구 신학이 한국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거나, 한국적 상황에 맞는 신학이 새로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당연한 상식선에서 변선환은 서구 신학의 기존 틀을 버리고 배타적 교리 중심의 기성 종교로부터 해방된 신학,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아시아적인 종교성과 민중성을 갖춘 새로운 신학(종교해방신학)을 추구했다.

예수 없는 기독교
기독교(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는 종교이다. 유대민족을 억압했던 제국 로마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를 참 신이자 참 인간으로 선포했다. 제국으로부터 탄압받던 기독교는 제국의 뒷받침을 받아 공식적인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을 벌이다가 죽음을 맞이한 가난한 청년 예수는 종교의 신이 되었다.
예수는 기독교를 직접 창시하지 않았으나,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를 신성화, 체계화하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었다. 이후 종교로서 기독교는 삶의 자리에서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보다는 그리스도(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전통 기독교 신학에서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신적 존재로서의 의미가 강함)로 그를 경배하기 시작했다.
모든 기독교회가 다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만,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는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살았던 청년 예수의 삶에 주목하기보다는 각종 교리로 예수가 왜 신일 수밖에 없는지 끊임없이 변증하는 일에 몰두했다. 기독교의 본질이 예수라고 하나, 정작 많은 교조주의자는 그 예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민중의 삶과 상관없는 수많은 현학적 교리들을 만들어 예수를 기독교 교리에 가둬 버리는 우를 범했다. 이러한 탓에 ‘예수 그리스도’에서 인간 ‘예수’는 점차 사라지고 신으로서 ‘그리스도’만 남는 반쪽짜리 신학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예수는 살면서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감행해왔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자긍심을 주고 뭇 생명을 살리는 생명 운동이자 평화운동이요, 평등주의적 민중운동이다. 당시 유대민족은 바깥으로 로마제국의 통치상황 속에서 억압받고 있었고, 안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형식논리에 빠져 율법으로 민중을 탄압하는 종교지도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땅에 사는 이주민이자 노동자인 가난한 청년 예수는 자신처럼 탄압받는 민중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차별당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를 로마 황제의 신민(臣民)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기면서 주체성과 평등성을 회복시킨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황제 중심의 수직적 권위주의 제국인 로마 체제에 위협으로 다가왔다. 또,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 법을 어기는 등 형식이 아니라 본질에 충실한 예수의 행동은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위협했다.
결국 예수는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의 결탁 하에 극악한 정치범들에게 내려지는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숨을 거두었다. 예수 죽음 이후 여러 제자가 그 뒤를 따랐으나, 교회가 제도화·권력화되면서 제국에 맞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점차 잊혀갔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승인한 후,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의 자리를 배고픈 거리에서 배부른 황금빛 성당으로 옮겨놓았다. 이들은 인간 예수가 감행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쏙 빼놓은 채, 참인간 예수의 모습을 닮은 신이 아닌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꾸며놓은 신을 찬양했다. 자신들의 지위를 신의 대리자로 격상시키고 민중 위에 군림하여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권력을 누렸다.
구원 없는 한국교회

오늘의 기독교,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 큰 권력을 누리고 있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예수를 탄압하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 중세교회의 부패한 성직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행보를 보인다. 한국교회는 특히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근본주의 신학은 성경이 쓰일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따른 해석을 무시한 채 성경에 쓰인 문자 그 자체를 절대화하는 반지성적 신학이다. 이 신학은 사회변동을 극히 싫어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극우 보수정권과 친화성을 보인다.
정치적으로 한국 개신교는 한국전쟁 이후 근본주의와 극우 반공주의로 나아가면서 이승만, 박정희 등 독재정권으로부터 엄청난 땅과 건물, 권력을 선물 받아 양적 확대를 이루었고, 그 대가로 독재정권의 타락한 도덕성을 열심히 포장했다. 현재까지도 극우 보수 성향의 대형교회 목사들과 이에 동조하는 교계·정치계의 기득권들은 오늘도 열심히 타 종교를 배척하고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면서, “윤 어게인”을 외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근본주의적 신학 사조와 극우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영향력이 한국교회 안에서 너무 큰 탓인지, 진보적인 소수 교회들을 제외한 대다수 한국교회는 이들의 논리에 침묵하거나 동조하고 있는 듯 보인다. 기독교의 핵심 사상인 ‘구원’에 대한 논의를 신학적 연구와 신앙적 체험을 통해 더 풍성하게 만들기는커녕,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단 하나의 배타적 생각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이 이외의 어떠한 생각도 교회 안에서 용납하지 않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한국교회가 낡고 앙상한 근본주의적 교리 몇 가지를 붙들고선 이 교리가 절대 진리인 양 행세하며 그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양심 있는 사람들을 내쳐버리기를 지속하는 한, 이러한 한국교회에는 희망이 없다. 트럼프의 침략전쟁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성스럽다고 포장하면서 전쟁을 부추기는 교회, 사회적 약자의 법인 차별금지법 제정을 막아서는 교회에 구원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수는 교회 담장 안이 아니라 늘 바깥 거리에 있었다.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존 웨슬리(1703-1791)도 거리에 있었다. 오늘날 착취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교회가 아니라 거리에 있다. 교회와 기업으로부터 쫓겨나고 해고당한 사람들이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참된 자유와 평등, 진리와 정의를 따르는 신앙인은 교회 안에서 구원의 흔적을 찾기조차 매우 어려운 형국이다.

가둘 수 없는 하나님
변선환은 예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동양의 작은 식민지 민중에게도 하나님 구원의 빛이 있음을 말하다가, 타 종교와의 열린 대화를 추구하다가 쫓겨났다. 그러나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그의 주장은 구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의 신학은 서구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를 전혀 들어본 적 없던 동양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이 땅의 민중들을 돌보고 구원했는지 묻는 작업이었다. 또한, 이미 불교 등 다른 종교가 병존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기독교의 배타성은 어떻게 재고되어야 하는지 묻는 작업이었다. 나아가, 하나님이 아닌 돈을 섬기고 약자를 혐오하는 한국교회에 과연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작동할 수나 있겠는지 경고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감리교를 사랑했고 아시아 민중의 해방에 목말랐던 사람 변선환의 말들이 교세 확장에, 돈벌이에 도움이 안 된다는 듯 교단 권력은 그를 기어이 내쫓고야 말았다. 예수를 막아섰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말이다.

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겸손하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절대적인 어떤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신 이외에는, 신을 생각하는 자기 생각을 포함한 그 어떤 절대적인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과 생각에 미지의 영역이 없다면 신이 나에게 들어올 공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학은 겸손한 마음으로 이 미지의 세계를 생각해보는 일이다.
신은 인간의 사고를 뛰어넘기에 신학은 절대적 결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신학함(Doing Theology. 신학을 특정 교리에 가두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삶에 반응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신학)’을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 역시 처음에는 성경 속 여러 인물의 말을 참고하겠지만, 종국에는 자기 자신의 언어로 자신만의 고유한 신앙고백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신은 과거의 그 무엇보다 지금 구체적인 현실을 사는 나를, 삶에 지친 수많은 우리를 살리는 데에(구원) 관심이 있다.
그 누가 그 어떤 교리로, 어떤 틀로 신을 가두려 해도 신은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인다. 진리는 속박이 아닌 자유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성경 요한복음 8장 32절).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변선환은 민중의 궁극적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권력화된 기독교가 포박해버린 하나님을 자유롭게 해 드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의 구원의 역사는 절대로 교회의 벽이나 성서와 전통교리,
기독교 서구 문명 속에 폐쇄되지 않는다.”
- 변선환

이효성
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업. 지금은 강원도에서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Footnotes
-
뉴스앤조이, 고 변선환 탄생 100주년 세미나, 그가 가르친 감신대에서 못 열렸다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4007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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