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갈 ‘진보적 과거’란 없다: 《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

‘좋았던 과거’, 그러나 과연 누구에게?
지난 여름 한국 극장가를 강타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다소 직설적이라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현대정치에 대한 우화였다. 쓰여진 지 거의 3천 년이 되어 가는 《오디세이아》의 스토리를 읊는 것을 ‘스포일러’라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그럼에도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들에겐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영화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질서의 회복’이라는 원작의 서사를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동시에 그 모든 행적을 현대 정치와 국제질서에 대한 알레고리로 삼았다.
영화는 오디세우스(맷 데이먼 분)가 트로이 전쟁에 출병하기 전 이타카 섬에서 선정(善政)을 펴던 ‘좋았던 과거’를 미국이 주도하던 이른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어떻게 보아도 도널드 트럼프를 연상케 하는 구혼자의 대표 안티노오스(로버트 패틴슨 분)가 오디세우스가 없는 이타카의 궁전에서 주도하는 난장판을 오늘날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종막(終幕)에 비유한다.

분명히 신제국주의와 유사 파시즘 정치가 준동하며 국내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들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2026년 트럼프 행정부의 시대보다, 아버지 부시-클린턴-오바마로 이어지는(심지어 아웃라이어로 취급받던 아들 부시의 행정부조차도) 최소한 자유주의의 외양을 띠었던 과거의 시대가 더욱 ‘상식적’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삐딱한 의문이 솟아오른다. ‘좋았던 과거’, 그런데 대체 이 과거는 누구에게 좋았다는 말인가?
누구에게나 보통선거권이 있고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지지할 수 있다는 자유. 또 한편으로는 누구나(정말 누구나일까?) 중국 선전에 공장을 짓고 인형에서부터 스마트폰까지 모든 것을 서구 국가들의 휘황찬란한 가판대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자유. 그러나 세계가 보통선거라는 날개와 자본주의라는 심장을 달고 날았던 사반세기간의 ‘좋았던 시절’에, 정말로 우리는 이 세계의 ‘주권자’로서 존재했는가? 지난 7월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된 도메니코 로수르도의 《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는 바로 이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왜 지금 로수르도인가
도메니코 로수르도(1941-2018)는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철학자이자 이탈리아 공산당(PCI)의 오랜 지지자였다. 흔히 안토니오 그람시의 전통과 맥락을 이어받는 것으로 여겨지는 로수르도의 렌즈는 그 자체로 이미 현대라는 시기를 규정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된 ‘자유주의’를 낱낱이 해체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췄다.

1993년 처음 발간된 본고가 한국에 번역서로 들어오는 데에는 무려 3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왜 굳이 사반세기가 넘게 지난 90년대 이탈리아 좌파 사상가의 저서를 지금 한국에 소개하는 걸까? 역자인 장석준 전 정의정책연구소장은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2024년 12월 3일 밤의 느닷없는 비상계엄 이후, 이 ‘친위쿠데타’의 진압과 단죄를 둘러싸고 옥신각신할 때마다, 우리말로 아직 소개되지 않은 책 하나가 떠오르곤 했다. 이탈리아의 역사학자‧정치철학자 도메니코 로수르도의 《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였다. 이 책은 이탈리아어판이 1993년에 나왔지만, 영어판은 한참 뒤인 2024년 4월에야 나왔다. 나는 영어판이 나오자마자 책 내용을 살펴보고, 이 책이 우리말로 꼭 소개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의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를 돌아보는 데 더없이 좋은 참고자료가 되겠다 싶어서였다. 그러던 와중에 한국 대통령제의 모순과 한계가 극적인 형태로 폭발해버렸다.”1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단어는 진보정당이나 사회운동만을 넘어 한국의 정치사회를 분석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제는 익숙한 키워드가 되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1987년의 민주화는 새뮤얼 헌팅턴의 분석에 따르면 ‘타협적 민주화(Transplacement)’, 즉 지배집단의 온건파와 반체제 온건파의 타협을 통한 불완전한 민주화였다.

약간의 연도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 책이 쓰여진 1993년은 이른바 자유주의가 소련과 동구권 블록의 해체를 통해 ‘역사적 승리’를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은 해다. ‘역사의 종언’이라 할 만큼 자유주의-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낙관이 팽배하던 이 시기는 로수르도의 분석에 의거하면 실은 세계가 ‘연성 보나파르트주의’로 빠르게 이행하던 시기였고, 제왕적 대통령제를 자리잡게 한 –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12.3 내란을 잉태한 한국의 1987년 민주화 역시 바로 이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이다. 로수르도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우선 자유주의라는 역사적 기획이 그 태생부터 내포하고 있던 제도주의적 보수성을 강조한다.
의회권력을 우회하는 보나파르트주의
‘보나파르트주의(Bonarpartism)’란 무엇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621)와 그의 후계자 루이 나폴레옹(1808-1873)의 정치행태에서 착안하여 그 이름을 딴 보나파르트주의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틀에서 ‘적대적 제계급의 대립이라는 상황 속, 국가 행정력이 개인의 지배 하에서 사회 전체에 대해 독재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체제를 뜻한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민중의 의지’를 담지하는 인상을 주며 의회제를 우회하여 통치하는 체제는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서도 익숙하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파편화된 소농과 노동계급이 강력한 권력자에게 의존하고자 했던 당대 프랑스의 계급적 조건을 분석하지만, 로수르도는 이에 더해 보나파르트주의가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면서도 저항을 분쇄할 수 있었던 조건으로 ‘보통선거제의 유지와 활용’을 강조한다.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 제2제정을 열어 황제에 등극했고, 의회와 보통선거를 유지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본인 중심의 개인독재를 행했다.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양 축인 보통선거(민주주의)와 자본계급의 경제적 자유(자유주의)를 설명할 때 후자의 완성으로 전자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일반적 사관(史觀)이다. 그러나 실상 양자는 태생적으로 견제와 상호불신의 관계에서 출발했다. 19세기 자유주의의 핵심 사상가들이었던 토크빌, 밀, 부르크하르트 등은 대두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적 자유를 박탈하게 될지도 모르는 대중의 정치참여를 두려워했고, 재산과 교육 여하에 따른 제한선거를 옹호했다. 이는 자유주의가 애초부터 민주주의의 제한을 전제한 채 구성된 이데올로기임을 보여준다.
보통선거권이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보편 질서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피지배계급의 투표권 쟁취 투쟁이었다. 초창기 부르주아지는 재산에 따른 제한선거로 이를 봉쇄했으나, 이후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제한선거라는 장벽이 무너진 이후에는 보통선거를 전제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대중의 정치참여가 끼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 즉 보나파르트주의 – 를 통해 이를 우회하고자 했다. 자유주의자들 역시 체제를 파괴할 듯 보이는 ‘해방적 기획’, 보통선거제의 확대에 대한 ‘탈해방적 대안’으로서 보나파르트주의를 용인했다.
세계 최초로 도입된 미국의 대통령제는 프랑스 혁명이 만들어낸 공화주의적 의회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체제로 구성되었다. 조지 워싱턴의 생각처럼 ‘선출 군주’에 가까웠던 대통령은 특정 정당의 이해관계를 넘어 ‘전체 국민의 대변자’를 자처했다. 이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대표로 꼽히는 미국의 민주주의는 그 시작에서부터 루이 나폴레옹의 그것과 공통점을 갖는 ‘연성 보나파르트주의’로 출발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의회를 우회한 행정권력의 직접 선출은 보나파르트주의가 민주주의라는 외양 아래 제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탈해방적 기획’, 소선거구제의 함정
초기 미국에서 의회 선거는 재산에 따른 제한선거로 진행되었지만(19세기 초반부터 참정권의 확대가 진행되었다), 보통선거의 확대를 위한 투쟁은 끊이지 않았고 19세기 중반 남북전쟁을 거치며 참정권의 확대는 거스를 수 없는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여기서 민주적 외양을 유지하면서도 또 다른 ‘탈해방적 대안’으로서 기능한 것은 소선거구제였다.
지역 단위로 선거구를 쪼개 각 선거구당 1명만을 선출하여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All or nothing)’가 되게끔 하는 소선거구제는 필연적으로 사표(死票)를 발생시키며, 보통선거의 존재의의인 ‘1인 1표’를 실질적으로 훼손하여 거대 양당으로의 정치권력 집중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양당으로 다양한 경향이 수렴되게끔 하여 상호간의 이념적 차이를 희석시킨다. 이는 대통령제를 통한 행정권력의 극대화와 맞물려 민주주의의 확대를 차단하고 소수 정치엘리트 집단의 자유주의적 지배를 강화했다.
오늘날 소선거구제로 치러지는 미국의 상·하원 선거에서는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 선거구 획정 시 특정 정당에 유리한 방식으로 자의적 조정하는 것: 편집자 주)’이 일상적이다. 예를 들어 공화당의 텃밭인 미국 남부 주에서 게리맨더링은 단순히 공화당에 유리하게끔 선거구를 재조정하는 것을 넘어, 민주당을 지지할 확률이 높은 흑인과 히스패닉 유권자들의 표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보통선거의 확대로 투표권을 얻은 주체들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투표로 누군가를 당선시킬 수는 없는 셈이다.


저자는 이렇게 ‘탈해방적 기획’으로 사용되는 소선거구제와 대치되는 ‘해방적 기획’으로서 비례대표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비례대표제를 쟁취하는 투쟁은 곧 표의 등가성으로 상징되는 평등의 원칙을 쟁취하는 운동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경향은 한국에서도 5.16 군사정변과 제3공화국 수립 이후 조금씩 그 양상을 달리하며 반복되어 왔다. 군부에 기반한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박정희는 민주적 사회질서가 충분히 자리잡지 못했던 한국 사회의 루이 나폴레옹으로 기능했고, 의회권력의 완전한 우회가 불가능해진 1987년의 ‘타협적 민주화’ 시기 온건 민주화 세력과 지배계층은 소선거구제를 통해 급진 민주화 세력의 정치권력 진출을 차단하는 방식의 합의를 택했다.
이재명의 SNS를 통한 ‘대국민 직접 소통’, 한동훈과 국민의힘의 비례대표제 폐지 요구는 로수르도의 맥락에서 모두 연성 보나파르트주의의 한국적 변용에 다름없다. 2004년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이 ‘K-연성 보나파르트주의’에 적잖은 타격을 가했지만, 양당은 의석수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이를 무화(無化)하는 데 성공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 ‘강한 지도자’를 지향했던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은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의 희비극적 재현이었다. 로수르도의 사유는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연성 보나파르트주의가 지속되는 한 내란을 잉태하는 정세적 조건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고찰을 우리에게 던진다.


좌파와 정치개혁
역사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도구’라는 테제 하에 좌익적-해방적 경향성이 ‘의회주의’로 수렴되는 것을 경계해 왔고, 이는 현실사회주의의 도래와 붕괴, 유럽 사회민주당들의 우경화 등의 과정을 거치며 전 세계 좌파 진영의 끝나지 않는 논쟁 주제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주로 의회주의를 수용한 전 세계의 좌파 정당들이 주도해 온 ‘정치개혁’이라는 논의는 흔히 비(非)마르크스주의적이며 개량주의적인 것으로 폄하되어 오곤 했다.
그러나 로수르도의 사유는 이 논쟁의 전제 자체를 뒤흔든다. 《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경제-하부구조적 혁명만이 아니라 평등과 민주성을 실질적으로 쟁취하기 위한 현대의 모든 정치적 기획들이 체제 이행에 유효한 ‘해방적 기획’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선거제도 개혁과 정치개혁이 더 이상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차적 의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해방적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역자는 이 책을 어떤 관점으로 읽으면 좋겠냐는 한 독자의 질문에 “기존에 사회주의나 계급투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 형식 정도로만 여겨졌던 비례대표제가 실은 노동자 민중 민주주의의 필연적 형태임을 확인하는 독서가 되면 좋겠습니다.”라 이야기한다. 역자의 말대로 발간으로부터 33년이 지난 길고 두꺼운 이 책이 2026년 7월 굳이 한국에 번역되어야 했던 이유는, 어쩌면 오늘날 좌파와 진보정치가 지난한 부침에도 불구하고 정치개혁이라는 아젠다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돌아갈 ‘진보적 과거’란 없다

글을 닫기 전에 다시 〈오디세이〉로 돌아가보자. 이타카의 왕궁에 귀환한 오디세우스는 왕위를 노리는 구혼자들을 처리한 후 아들인 텔레마코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시 긴 여행을 떠난다. 왕비 페넬로페와 함께 배를 타고 이타카를 떠나며, 오디세우스는 “좋았던 옛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체제를 안정시킨다 할지라도 여전히 이전의 자유주의 세계질서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미국 리버럴들의 씁쓸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실에 이타카의 위대한 군주 오디세우스의 좋은 시기란 없었다. 미국은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 30여 년간 세계의 맹주 자리를 꿰찼지만, 그 시기에조차 모든 해방적 기획을 막아세우기 위한 연성 보나파르트주의 국가로서의 탈해방적 기획을 단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 이는 비단 침략전쟁과 제국주의적 자본수출의 문제만이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미국의 소선거구제와 선거인단제로 대표되는 대통령제는 국내적으로 노동계급과 소수인종의 정치적 발돋움을 차단하는 장치로 작동해 왔고, 트럼피즘의 도래 이전까지 양당은 폭넓은 스펙트럼의 이익집단들을 경쟁적으로 포섭하며 체제를 뒤흔드는 해방적 집단의 성장을 막아 왔다.
이런 상황 속 머지않은 듯 보이는, 혹은 이미 도래했는지도 모르는 ‘경성 보나파르트주의’의 시대 – 혹은 파시즘적 광기의 시대 – 는 마치 과거의 연성 보나파르트주의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보적 과거’라는 환상을 심어 주기 쉽다. 《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는 책의 전체 페이지를 할애해 “그렇지 않다”는 말을 외친다. 로수르도는 33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마치 무엇보다 자유롭고 또한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던 과거의 체제가 실상은 얼마나 기만적이었던지를, 그리고 그 역사적 퇴행 속에서 과거로의 회귀가 결코 진보적인 것도, 퇴행을 막아내는 방식도 되지 못한다는 교훈을 2026년의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목인 ‘민주주의를 둘러싼 200년의 전쟁’은 그 ‘회귀’를 넘어서기 위한 수많은 해방적 기획들이 탈해방적 대안들에 맞서고, 때로 작은 승리를, 때로는 거대한 패배를 겪어 온 오늘까지의 모든 역사를 뜻할 것이다. 이 전쟁은 아마 앞으로도 반영구적으로 지속될 것이지만, 그 전쟁의 방향성이 오늘날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
도메니코 로수르도 저 / 장석준 옮김 / 산현글방 / 2026
’도모서재’는 다양한 독자들이 추천하는 수많은 책 속에서 때로는 세상을 꿰뚫는 날카로움을, 때로는 마음을 울리는 연대의 따스함을 찾고자 하는 웹진 도모의 도서 리뷰 코너입니다. ’도모서재’에 서평을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도영 편집장(ldy0510@naver.com)에게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이자 《도모》 편집장. 아마추어 디자이너 일도 가끔 한다.
여전히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만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고자 한다.
Footnotes
-
도메니코 로수르도, 장석준, 《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 역자 서문, 6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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