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전히, 박원순이라는 시험대
‘페미니스트 정치학교’ 2박 3일 워크숍을 마치고 광주에서 서울로 막 올라온 일요일이었다. 대변인으로서 정의당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지 딱 2주째, 이전 직장이던 ‘망원정x’1에서 못다한 일을 함께 마무리하기 위해 다녀온 워크숍이었다. 지친 몸으로 버스에서 짐을 내리고 있을 때, 누군가 말했다. “이재명이 트위터에서 박원순 샤라웃(Shout out, 공개적인 자리나 매체에서 특정인을 언급하며 소환하는 것: 편집자 주) 했는데?” 하고.

2026년 10월 11일, 이재명 대통령이 자신의 X(구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언급했다.2 본인의 SNS 사용 방식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에 대응하며, “박원순은 자신에게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 트윗을 읽고 내가 처음 꺼낸 말은 “왜?”였다.
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SNS 사용 방식에 대한 변명을 위해 왜 박원순이 언급되어야만 했을까. 박원순이라는 이름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이름을 다시 공적인 자리로 불러내는 일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이재명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호명은 순식간에 나를 다시 2020년 여름으로 데려다 놓았다.
기록적인 폭우가 있던 해였다. 우산을 자주 깜빡하는 나 같은 사람도 휴대용 우산을 가지고 다니게 만들었던, 소나기가 순식간에 쏟아졌다가 금세 맑아지고 또 다시 비가 내리길 반복했던 그해 여름. 박원순의 전직 비서가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성폭력이었다. 그리고 고소장이 제출된 지 이틀째 되던 날, 박원순이 자살했다.


그가 죽은 후,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설명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열어야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그런 그를 ‘피해 호소인’이라는 기이한 호칭으로 불러댔다. 박원순이 시민사회에 얼마나 대단한 공을 세웠는지, 얼마나 훌륭한 정치인이었는지 이야기하는 데에 그리도 거침이 없던 사람들이 정작 피해자를 피해자라고 부르는 데에는 한없이 신중했다. 서울시는 박원순의 장례를 서울특별시장으로 치르기로 했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시민 분향소가 차려졌다. 징그러운 인파가 이어졌다.
2020년의 정의당이 조금 더 용감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자주 생각한다. 민주당 지지층으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피해자와 연대하겠다는 뜻을 더 분명하게 지켰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거세지는 것을 막고자 조문을 거부했던 두 의원의 결정이 사과의 대상이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장례기간에 추모의 뜻을 표하는 것과 피해 고소인에 대한 연대 의사를 밝히는 일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와 정의당의 입장이었다”3고 말했다. 피해 고소인. 추모. 연대. 서로 대립하지 않음. 그 모든 단어가 아직까지도 돌덩이처럼 내 마음을 꽉 짓누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날 두 의원이 내린 결정이 남긴 것은 분명히 있다. 모두가 박원순을 애도하고 있을 때, 애도의 행렬에서 빠져나와 피해자의 곁에 서겠다고 말한 사람 중 한 명이 여전히 당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는지.
덕분에 2026년 정의당의 대변인이 된 나는 이재명 대통령의 박원순 전 시장 언급에 대한 비판 성명을 망설임 없이, 두려움 없이, 스스로에 대한 의심 없이 써내려갈 수 있었다.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2020년의 선택을 계속 이어간다는 마음으로 썼다. 그때 진보정당이 당연히 해야 했던 말들을 뒤늦게나마 이어쓴다는 생각과 마음이었다.

[논평] 성폭력 가해자 박원순을 미화한 이재명 대통령, 사과하십시오
오늘 이재명 대통령이 SNS에 “제게 소통과 그 수단인 SNS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신 분”이라며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언급했습니다.
대통령께 묻습니다. 박원순을 추억하는 동안, 그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 피해자는 생각나지 않으셨습니까?
박원순 전 시장의 권력형 성범죄는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와 법원의 판단을 통해 확인된 사안입니다. 그런데도 피해자의 고통은 외면 받았고, 가해자의 업적과 인간적인 면모만을 기억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싸워야만 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2차 가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자신의 SNS 소통 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까지 미화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전국민이 목격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가 공개적으로 가해자를 기리는 명백한 2차 가해에 분노가 치밉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본인의 소통방식을 변호하는 데에 성폭력 피해자의 존엄을 희생시키지 마십시오. 해당 발언을 철회하고 본인이 저지른 2차 가해에 대해 피해자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십시오.
2026.10.11
정의당 대변인 김나율
그러나 써내려갈 때 당당했던 마음과 별개로, 내가 쓴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다. 대통령의 SNS 게시물이 올라온 지 몇 시간만에 논평을 썼고, 오후에 논평이 나간 이후 계속 뉴스창에 ‘정의당’을 검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화가 시작됐다. ‘박원순을 추억하는 동안 그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 피해자는 생각나지 않으셨습니까?’라는 문장이 주로 인용됐다.

정의당 SNS 채널에는 2차 피해를 유발하는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논평이 나가고 1시간 뒤 댓글 창을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래도 입맛이 썼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 말해 왔던 민주당 위성정당의 정치인들은, 그리고 그들이 속한 정당들은 끝내 침묵했다. 그 누구도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하는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이들 모두가 윤석열 정부의 여성혐오에는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다.
진보당 손솔 의원은 이재명의 박원순 언급 이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SNS 정치에 관한 질문을 받자 “정책과 사회적 의제를 전달하는 데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대답했다. 손 의원은 그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회 앞에서 교제폭력 피해자 추모 및 국회 책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원래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지킬 수 있는 원칙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다.

어떤 일은 그저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갖게 한다. 피해자의 이름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누군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난 피해자의 존엄. 내가 쓴 논평이 피해자를 향한 공격의 또 다른 불씨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6년이 지나도록 박원순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자신의 피해를 의심하는 말들을 마주해야 할 피해자를 생각하면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러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침묵이 길어지면, 사람들은 그래도 되는 줄 안다. 아무렇지 않게 가해자의 공을 추켜세우고 과는 없는 것처럼 치부해 버린다. 그런 장면을 너무 많이 봐왔다. 박원순은 여전히 정치의 원칙을 시험하는 이름이다. 어떤 얼굴들을 떠올리며 정치하는지를 알 수 있게 만드는 리트머스지다. 2020년 그의 죽음 앞에서 진보정치는 누구의 곁에 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고, 2026년 대통령의 입을 통해 다시 소환된 그의 이름 앞에서 한번 더 같은 질문을 마주했다.
앞으로 우리에게는 이와 비슷한 순간들이 수도 없이 찾아올 것이다. ‘그럴 리 없는’ 사람이 가해자인 순간, 피해자의 목소리가 조직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순간, 옳다고 믿는 말을 계속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 우리 편의 허물을 조용히 감싸고 싶어지는 순간. 그런 순간에도 계속 선명해지자고 말하고 싶다. 지금 우리의 선택들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란 사실을 의심하지 말자고, 우리 스스로도 지금 누군가가 밝혀 놓은 길 위에 서 있다고.

김나율
정의당 대변인.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여자친구와 일상을 보내고 있다.
세상을 바꿀 정치와 예술, 우정의 가능성을 믿고 있다.
Footnotes
-
이재명 X(트위터), 2026년 10월 11일 https://x.com/Jaemyung_Lee/status/2109089680595800404?s=20 ↩
-
KBS 뉴스, 심상정, ‘故 박원순 조문 논란’에 “상처드렸다면 사과”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4493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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