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소설: 실비아 플라스는 죽음을 저주했을까 (3화)
웹진 《도모》는 2026년 5월호부터 사회운동·진보정치단체 전환 회원이자 작가인 최정운의 소설을 독자투고란에서 월 1회 연재 중입니다. 도모 편집부 사정으로 2026년 7~9월호 휴재 이후 10월호부터 연재를 재개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부)

어느 순간 눈을 뜨니 어두웠던 영화관엔 이미 불이 들어왔고, 스크린에서도 엔딩 크레딧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나갔던 정신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잘 잤니?”
옆에서 김 감독이 말을 걸어왔다. 김 감독의 말을 듣자마자 길을 잃었던 직전의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돌아왔다. 나는 김 감독을 빤히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던가. 김 감독의 얼굴과 관련한 인상들은 세부적인 사항에서 약간 달랐지만, 항상 날카롭다. 무섭다. 같은 감상에서 벗어난 적 없었다. 그런데 오늘 김 감독의 얼굴은 약간, 정말 아주 약간이지만 불쌍해 보였다.
영화관을 나온 뒤에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거리를 걸었다. 내가 사과해야 하나 싶었지만 나만 사과하게 되는 건 싫었다. 그리고 내가 사과한다고 김 감독도 사과할 거란 보장도 없었고. 애초에 저 인간이 사과라는 걸 해본 적이 있긴 할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원래 저런 영화 좋아했어요? 고어 영화 같은 거?”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질문을 꺼냈다. 내가 눈치를 살피는 동안에도 김 감독은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길바닥에 놓인 작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돌멩이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다가 보도블록 사이의 틈새에 걸려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 영화가 고어는 아니지.”
김 감독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가져다 대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김 감독의 앞을 가득 메웠다.
“고어는 잔인함 그 자체가 장르여야 해. 뭐, 인간 지네처럼. 그런데, 음, 예를 들어서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나 샤이닝 같은 영화들은 영화 자체에 잔인한 장면은 많지만, 그 자체가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이나 목적이라고 볼 수 없잖아. 모두 다른 주제 의식이나 인물의 심리 묘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김 감독이 담배를 문 채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봐야 해.”
“사랑이요?”
나는 놀라서 곧장 되물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데 그게 사랑일 수 있어요?”
내가 묻자 김 감독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넌 사랑이 아름다운 감정이라고만 생각해?”
김 감독은 끝이 다 타버린 담배를 도로 한 쪽에 던지고 가로등을 잡은 채로 가로등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마치 사랑은 비를 타고의 한 장면 같았다.
“이러니 사람들이 다이아몬드가 처음부터 원뿔 모양인 줄 알지.”
김 감독은 가로등에 기대어 나를 조용히 바라봤다.
“바르다가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만들었을 때 나이가 몇 살인지 알아?”
김 감독이 담뱃갑에서 마지막 담배를 꺼내고 잔뜩 구겨진 갑을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라이터에 불이 피어오르자 그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아녜스 바르다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영화과 출신도 아닌데다 시네필은 더더욱 아닌 내가 그걸 알 턱이 있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보도블록의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글쎄요? 서른?”
고개를 들어보니 김 감독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냥 모른다고 할 걸. 나는 항상 나의 무지를 인정하지 못해 느껴도 되지 않을 부끄러움을 느끼곤 했다.
“스물여섯, 되게 어리지?”
김 감독은 왼손을 들고 손가락을 펼치고 말을 이었다.
“트뤼포는 스물여덟, 샤브롤은 스물일곱, 고다르는 스물아홉 리베트는 서른…”
그는 감독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면서 손가락을 접었다. 마침내 호명이 끝나자 그는 다시 너털웃음을 지었다.
“난 대충 트뤼포랑 비슷한 나이대에 데뷔작을 낸 셈인데. 이젠 트뤼포가 데뷔할 때 나이보다 죽을 때 나이랑 더 가까워.”
김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연신 담배를 피웠다.
“가끔 데뷔작이 데뷔작이 아니라 은퇴작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해. 현강이랑 1억 들고 시작한 영화가 심사위원상을 탈 줄 알았겠어?”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 자리에서 다리를 쪼그리고 앉았다.
“그땐 영화 두, 세 편 내면 바로 황금종려상 탈 줄 알았는데. 참 웃겨 그치?”
김 감독이 팔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지? 내가 아는 김 감독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기 능력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그 태도가 항상 자존감과 자만심 그 사이 어딘가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본인이 제일 긴요하다 믿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좋은 영화 많이 만드셨잖아요.”
내가 말을 건네자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들었지. 좋은 영화만 만들었지.”
그는 급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을 이었다.
“중간에 그만둘 수 있거나 대기만성하는 것도 축복이야.”
김 감독은 몸을 돌리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인간이 스무 살이 되자마자 죽는다면 모든 인간이 지금보단 행복할 텐데.”
김 감독은 속삭이듯 이야기했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들렸다.
“내 말은 무언가를 몹시 미워하는 건, 무언가를 몹시 사랑했을 때만 가능하단 거야.”
김 감독은 나로부터 저만치 멀어졌다. 그의 등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현강 언니도 그랬을까요?”
내가 김 감독을 향해 두 손을 모아 크게 외쳤다. 김 감독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서 있는 쪽을 돌아봤다.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했을까요?”
그 물음 안에는 단순한 궁금증만 들어있지 않았다. 정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을 바라는 질문이었다
“나보단 네가 잘 잘 알 텐데.”
그가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싫어하기보단 미워하는 쪽이었지. 우리 모두를.”
김 감독이 내게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저녁 겸 술이나 먹자. 내가 살게.”
나는 그를 따라나서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마음속 실타래가 풀린 건 아니었지만, 이제 바늘에 실을 꿴 느낌이었다. 파리에 와서 실 끝을 너무 오래 바라본 탓인지 눈 끝이 살짝 시렸다.
파리 5구, 생제르맹 거리엔 부유한 현지인, 돈을 쓰러 놀러 온 미국의 관광객, 그리고 나 같은 동양인 관광객 등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음에도 많은 사람이 식당에서 식사에 술을 곁들이고 있었다. 나는 김 감독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가게의 내부를 파악했다. 높은 샹젤리제와 이름을 모르겠는 와인들 거기에 살면서 처음으로 보는 디캔팅에 열중인 소믈리에까지. 딱 봐도 비싼 음식만 잔뜩 있는 가게 같았다. 메뉴라도 구경할까 싶어 자주색 가죽을 덧씌운 메뉴판을 열어보았다. 메뉴판 표지가 제법 무거웠다. 첫 페이지를 위부터 아래까지 간략하게 훑었다. 죄다 불어로 적혀있어서 정확히 무슨 요리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일 싼 메뉴가 180유로였다.
“조금 전까지 세상 불쌍한 척하더니만 돈 되게 많나 보네.”
나는 입술을 앞으로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식당 오른쪽을 보니 김 감독이 손을 털며 자리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김 감독이 자리에 앉기 위해 의자를 빼며 물었다.
“어… 스테이크?”
나는 메뉴를 보는 척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립아이?”
“네.”
김 감독은 내 대답을 듣고 자기 앞에 있는 메뉴판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시킨다?”
김 감독이 나에게 물었다. 그의 얼굴이 메뉴판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김 감독은 잠시 메뉴판을 낮게 들어서 내 반응을 확인하고는 웨이터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웨이터가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자 김 감독은 메뉴판을 짚으며 불어로 주문했다. 잠시 후 여러 가지 프랑스 음식과 와인이 나오고 우리는 말없이 음식과 술을 먹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와인 한 병이 비어갈 때쯤 김 감독이 입을 열었다.
“배우는 왜 계속한 거야?”
그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물었다.
“네?”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끝에 놓인 와인잔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나한테 배우 그만두라고 할 생각인가. 재능 없다고, 그쯤 했으면 됐다고 독설을 날릴 생각인가 싶어 마른침을 삼켰다. 그에 비해 김 감독은 계속 와인만 마시다가 식탁보의 끝을 잡고 접기도 했다. 어색함을 피하려는 걸까. 그냥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 현강이가 너 꼬셔서 오디션 보게 한 거 아니었어? 딱히 연기랑 관련 있는 과도 아니지 않았나. 경영?”
김 감독이 와인잔을 내려놓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김 감독의 눈을 피하려고 해도 김 감독의 시선이 너무도 올곧게 나를 향하고 있었기에 피할 수 없었다. 검은색 선글라스로 인해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슨 표정인지 알 것만 같았다.
“얘기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 거짓말할 거면 더 하지 말고.”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오리 다리를 잘라 포크로 찍어 먹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내 양손을 움직여 손가락을 튕겼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는 느낌이었고, 이런 기분 때문에 김 감독을 다시 만나기 싫었다. 만나면 항상 동등한 느낌이 안 들었으니까. 그래서 이번만은 정면 돌파를 하고 싶었다.
“글쎄요.”
속에 깊이 숨겨둔 이야기를 하려니 목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뱉어내려고 노력했다. 나는 왜 이곳에 왔는가. 배우를 계속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나? 난 증명해야 했다. 김 감독에게 증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언니, 언니?
“사실 맞아요. 처음엔 언니 덕분에 시작했어요. 솔직히,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작가가, 심지어 좋아하는 언니가 나 보고 배우 해볼 생각 있냐는데 설레죠. 당연히. 그런데 그렇게 오디션 자리에서 연기를 하는데…”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항상 너는 돈도 안 되는 연기를 왜 하냐. 는 질문에 대답을 해왔으나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꿈꿀 시기는 지나지 않았느냐, 이제 현실을 살아라. 같은 조언 같은 오만을 숨 쉬듯이 내뱉을 뿐이었다. 나를 유일하게 인정해주던 사람은 죽었고. 이제 내 재능을 보증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고. 이제 나에게 남은 하나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과 닮은 어느 무기력한 감독뿐이었으니 이 사람에게라도 다 말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언니가 들을지도 모르니까. 언니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때 감독님 눈빛이, 감독님이 무서운 사람인 줄 알고 사실 엄청 쫄았는데. 나를 이해하는 듯한, 아니 이해받는 듯한 눈빛이었어요. 그래서 나도 이 세계에 속하고 싶다. 내가 나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는 여기뿐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까지…”
문장을 맺을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말을 흐렸다. 왜인지 모르게 목이 메어왔다. 김 감독은 무슨 표정일까? 유난 떤다고 생각하겠지? 빨리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죄송해요. 제가 어휘력이 떨어져서.”
나는 바지 위에 깔아둔 냅킨을 양손으로 들고 계속 냅킨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냐. 무슨 얘긴지 충분히 알겠어. 그러면 된 거지 뭐.”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김 감독은 전례 없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파리에 와서 처음으로 본 예전 김 감독의 모습이었다.
“난 솔직히 네가 배우 안 했으면 했어.”
김 감독은 평소보다 높낮이가 없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 다소 초점이 없어 보이는 시선과 달리 지금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음에도 시선이 향하고 있는 것이 명확히 느껴졌다.
“뭐, 연기를 못 했다는 건 아니고, 잘했지. 잘했는데, 일반인 같더라고. 우리 주변에 있는 일반인, 연기 말고 다른 것도 할 수 있는 사람.”
그는 발을 밀어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당겨 앉고 어깨를 으쓱한 다음 말을 이었다.
“사실 연기도 그렇고 연출도 그렇고 가장 순수하게 좋아하기 위해선 직접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우리는 지구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거야. 저 먼 우주로 가는 거지. 그렇게 저 멀리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주변엔 아무도 없어. 그래도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고, 또 별이 가까워 보이니까 계속 앞으로 가는 거지.”
김 감독은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돌아가기엔 늦었잖아? 그렇지? 그래서 아무 연고도 없는 파리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거고.”
김 감독이 물었다. 분명히 무례한 말이었으나 왜인지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감독님은 왜 영화 만드는 일을 계속하셨어요? 예전에 저희 촬영할 때 항상 말씀하셨잖아요. 영화 따위 다시 태어나면 쳐다도 안 볼 거라고.”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이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이지만 오늘은 그가 답변해줄 거란 믿음이 생겼다. 김 감독은 잠시 고민하며 입을 다문 상태에서 양쪽 볼에 공기를 채우더니 다시 크게 내뱉었다.
“나는… 대학에서 영화학을 배울 땐 사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어. 그냥 좋아하는 게 영화뿐이어서 간 대학이었으니까 딱히 성공할 거란 생각도 없었어. ‘잘하면 평론가가 되겠구나.’ 했지. 영화 쪽에 재능이 있었던 것도 나보단 현강이 쪽에 가까웠으니까.”
나는 사뭇 놀랐다. 사실 세상은 언니에 대해 잘 몰랐다. 각본가로서 인지도는 있었으나 감독 생활 내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김 감독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그래서 당연히 자기가 천재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김 감독은 의외로 언니가 자기보다 위였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졸업하고 한 3년 지났나? 갑자기 김현강이 나한테 자기 시나리오를 영화화하고 싶다는 거야? 투자나 배급도 안 받아놓고. 그래서 부모님한테 사정해서 1억 빌리고, 엉망진창으로 연출해서 운 좋게 틀어줄 영화관도 찾았는데, 그게 대박이 난 거지. 덕분에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상영도 하게 되었고 말이야, 사실 그때까진 별 느낌 없었거든? 그런데 칸 영화제 상영회에서 내 영화가 끝나고 잠시 조용하다가 기립 박수가 나오는데 그때 처음 받아봤어. 내 발이 지면에서 5cm 정도 떨어진 느낌을, 살아있는 감각을. 그리고 깨달은 거야. 난 이제 이 순간만을 살아갈 수밖에 없구나.”
김 감독은 그답지 않게 빠른 속도로 양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열심히 설명했다. 나는 그가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예술가의 창작 욕구, 아이디어를 펼칠 때의 즐거움, 고뇌… 아무리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여도 찬란한 건 15분이야. 내 영화를 보고 손뼉을 치는 관객들이 떠나기까지 약 15분, 그 15분이 끝나면 난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도 영화관에 남아있는 누군가일 뿐이야. 그럼에도 그 모든 허무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 날 노트북에 앉아서 또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쓰는 거야. 모르지. 이번엔 평단이 혹평할 수도 있지만…그래도 쓰고 또 찍는 거야. 그 15분을 다시 느끼기 위해. 나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말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골랐다. 와인의 취기가 뒤늦게 올라왔는지 얼굴이 홍조를 띠었다. 아이 같았던 표정은 다시 삶에 찌든 무기력한 감독으로 되돌아왔다.
“진짜 내가 될 수 있는 건 고작 15분이었으니까…”
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숨을 내뱉었다. 그의 허리에서 힘이 빠지고 등이 이전보다 살짝 굽었다.
“네가 물었지? 현강이를 어떻게 원망할 수 있냐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반대쪽 입꼬리는 올라가지 않았다.
“원망하지. 어떻게 원망을 안 해. 내 빛나는 순간을 유일하게 기억해주는 사람이었는데.”
김 감독은 더는 말을 잊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런 김 감독을 보며 빈 와인잔에 와인을 끝까지 가득 따르고 한 번에 들이켰다. 취기가 올라왔다. 흐려지는 초점에 고개를 흔들었다. 심장이 느릿하게 뛰었다. 김 감독은 빨간 얼굴로 허리를 잔뜩 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분명히 나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 사람의 좋은, 혹은 인간적인 면모를 보게 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다. 김 감독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를 느끼는 걸까. 혹은 더는 탓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 화가 난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쪽 팔에 머리를 포개고 누워 창가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가게를 스쳐 지나갔다. 연인, 가족, 친구 또 홀로 걷는 사람들까지. 세상은 나와, 우리와 언니와 상관없이 돌아가는구나. 가끔 세상이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했다.
“나갈까?”
내 얼굴 바로 앞에서 김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김 감독을 쳐다봤다. 언제 불렀는지 모를 웨이터에게 카드를 돌려받은 김 감독은 비틀거리며 부산스럽게 짐을 챙겼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김 감독을 따라 가게 밖으로 나섰다. 찬 바람이 내 몸을 덮쳐왔다. 파리의 여름밤은 낮과 달리 적잖이 쌀쌀했다. 어딘가가 늘 끈적한 서울의 여름밤과는 달랐다. 서울의 밤은 낮을 잊지 않았으나 이곳의 밤은 낮 따윈 모른다는 듯이 굴었다. 김 감독과 나는 가게 바로 앞 테라스에 서서 달을 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달만 보았다. 주변 사람들이 내는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만 흘렀다. 나는 김 감독의 옆구리를 툭 치고는 담배를 무는 시늉을 했고, 김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 두 개비를 꺼내 하나는 나에게 건넸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가져갔다. 김 감독은 다른 쪽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니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감독님.”
나는 적막을 깨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작게 응. 이라고 대답했다.
“낮에 했던 말, 진심 아니에요.”
나는 왜인지 부끄러워 발로 바닥을 툭툭 차며 말을 이었다.
“좆같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가끔 재수 없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나는 김 감독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예전에 제가 대사 절 때, 그것도 연기의 과정이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계속해봐라. 라고 하셔서 아무 대사나 말했는데 컷하고 넘어가 주셨잖아요. 나중에 다시 찍긴 했지만.”
담배 연기를 삼키고 뱉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랑 주파수가 달라서 그렇지. 다정한 분이라고요.”
나는 김 감독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연신 담배를 피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나도 너 연기 못한다는 듯이 말해서 미안해.”
잠시 세상이 조용해졌다. 김 감독은 잠시 고민하는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미소를 지었다.
“나야 뭐… 연기 못했으면 널 뽑았겠니. 현강이야 당연한 거고. 너 배우로서 되게 좋아했어. 사적인 감정 다 떠나서, 나는 몰라도 현강이는 그랬다고.”
김 감독은 가게 외벽 밑에 작게 솟은 턱에 걸터앉았다. 나도 그를 따라 그곳에 따라 앉았다. 괜스레 여름밤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긴장이 풀리니 취기가 엄습했고 이내 눈이 감겼다. 파리에 한 달 정도는 머문 느낌이었다. 원래 집 따위 없었으나 오늘 하루는 이곳이 집인 느낌이었다.
옥상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어디 가고 금세 노을이 지고 있었다. 현강 언니네 집은 경기도 외곽에 있는 타운 하우스인지라 서울과 달리 노을이 가려지지 않고 잘 보였다. 나는 캠핑용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노을과 시나리오를 번갈아 응시했다.
“언니”
내가 입을 때자, 언니가 옆을 돌아봤다. 진 세버그와 같은 짧은 머리에 하얀색과 남색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금테 안경을 낀, 누가 봐도 내가 알고 있는 언니였다.
“왜? 뭐 이해 안 되는 거 있어?”
언니는 왼손에 든 버드와이저 병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나에게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전체적으로 등장인물 심리가 이해 안 돼. 왜 헤어지는지도, 그리고 둘 다 결말이 안 좋을 걸 알면서도 계속 도망치는 이유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언니가 설명 좀 해줘.”
나는 언니를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언니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김성진한테 물어보는 게 더 나을걸? 어차피 디렉팅도 걔가 하잖아. 설명도 걔가 더…”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시나리오를 잠시 내려놓았다. 언니는 말을 맺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디렉팅하죠! 화장하지 마라. 시나리오는 촬영 2시간 전부터 외워야 한다. 동선이 너무 자로 잰 듯이 딱 맞으면 안 된다. 맨날 이상한 소리만 하고 촬영장에서 담배나 뻑뻑 피우고. 물론 가끔 번뜩일 때가 있는 거 알아요. 그런데…와닿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이 이야기 만든 사람 생각을 듣고 싶어요. 그게 더 와닿을 것 같아.”
내가 말을 마치자 언니는 반쯤 누워있던 선베드의 등받이 부분을 들어 올리고 본격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아 손으로 턱을 잡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언니는 고개를 들고 혀를 찼다.
“나도 잘 모르는데.”
언니는 무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전혀 예상외의 답변이었다.
“자기가 만든 캐릭터인데도요?”
내가 당황하여 되묻자 언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나도 무슨 마음인지 잘 몰라. 물론 내가 만든 캐릭터이긴 하지만… 집필하던 시기의 마음도 제각기 다르고 또 집필하기 전의 마음과 집필한 후의 마음이 같다고도 할 수 없잖아. 너도 연기할 때 그렇지 않아? 아니면 살아갈 때도… 정말 친한 사람이라 해도 100퍼센트 이해한다고 확신할만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
그녀가 나에게 묻고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가. 조금의 의심이 들었다. 아마 내가 제일 이해하고 있는 건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일 텐데. 난 이 사람을 이해하고 있나. 분명히 그렇다고 확신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의심이 자라났다. 나는 언니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괜스레 캠핑 의자의 튀어나온 실밥을 뜯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생각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내 말을 들은 언니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나도 나름대로 시나리오나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경향성은 있지만, 그게 네 해석보다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어차피 인간이 다른 무언가를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공감을 해봐. 나름대로 네 세계관 안에서 해석해보라고.”
언니는 다시 선베드에 누운 다음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답이 없다는 건 뭐든 정답이 될 수 있단 말이기도 하니까.”
언니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나는 그런 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언니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언니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까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사랑해요, 언니.”
내가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응, 나도.”
언니는 다시 웃었다. 노을이 언니를 비추었다.
저자 소개
최정운
숭실대에서 꾸준히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며 줄곧 바다를 헤엄치는 나를 상상합니다. 이 세계에서 이뤄질 수 없는 것이 활자들 안에서 가능해진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합니다. 제가 만든 종이 한 장짜리 작은 세계가 어디로든 흘러서 누군가에게 꼭 닿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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