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로가기
편집국의 말: 돌아갈 곳이 없어져 버린 세상에 대하여

도모 편집국/편집장의 말

편집국의 말: 돌아갈 곳이 없어져 버린 세상에 대하여

최상희·읽기 3분

편집국의 말: 2026년 11월호

돌아갈 곳이 없어져 버린 세상에 대하여

※ 2026년 11월호 《도모》 ’편집장의 말’은 편집장 개인 사정으로 인해 최상희 집필위원의 ’편집국의 말’로 대신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도모》 2026년 11월호의 글들은 자꾸 어딘가를 떠나거나 어딘가로 돌아간다. 떠나감(出)이거나 돌아옴(歸)이거나. 돌아가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고, 돌아갈 곳은 없었다고 깨닫는 사람들이 있으며, 끝내 밖으로 나서거나 쫓겨난 사람들이 있다. 서평 ’돌아갈 ’진보적 과거’란 없다’는 『오디세이아』를 빌려, 돌아갈 곳을 잃은 자가 그래도 돌아가려 부르는 노래를 들려준다. ’호르무즈 앞에서 돌아보는 한국군 해외 파병의 역사’에서 필자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빌려, 한 아이의 고통 위에 세운 도시를 떠날 각오가 우리에게 있느냐고 묻는다.

오디세우스는 십 년을 떠돌다 이타카로 돌아간다. 궁을 어지럽히던 자들을 베고 왕위도 되찾는다. 그러나 그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좋았던 옛 시절은 다시 올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배를 띄운다. 무너지기 전의 세계, 빼앗기기 전의 저녁, 비기 전의 이름들. 그것들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자꾸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미 사라진 과거와 오지 않을 미래가 유령처럼 우리를 짓누른다. ’여전히, 박원순이라는 시험대’에서도 그렇다. 대통령은 지워져야 할 이름을 다시 불러냈다. 떠나보내지 못한 것은 이렇게 자꾸 돌아온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돌아갈 만한 좋은 과거 같은 건 없다. 앞서 언급한 서평에서 도메니코 로수르도는 되묻는다. 좋았다는 그 과거가 대체 누구에게 좋았느냐고. 보통선거와 자본주의를 두 날개 삼아 날던 그 사반세기에도, 우리가 세계의 주인이었던 적은 없었다. “‘웰니스’ 시대”는 다른 자리에서 같은 말을 한다. 노동시간을 줄여 겨우 되찾은 저녁이, 결국 내일 또 일할 몸을 손보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되찾은 줄 알았더니 어느새 빠져나갔다.

이름만 남고 속은 딴 것으로 찬 경우도 있다. ’양경수 6년의 민주노총’에서 양경수 집행부의 ’사회적 교섭’은 말만 요란할 뿐 그 안에 어떤 전략도 없다. 마찬가지다. ’미래대응기금이 대응하는 그들만의 미래’가 짚듯, 미래대응기금이라는 간판 뒤에 앉은 것은 ’반도체대응기금’이다. 반도체로 걷은 세금으로 반도체에 돈을 대고, 반도체 만드는 자의 세금은 다시 깎아준다. 이름은 ’미래’인데 그 돈이 돌아갈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다. 오디세우스가 돌아간 이타카의 궁도 이미 구혼자들이 어지럽힌 뒤였다. 돌아갈 곳은 돌아가기도 전에 딴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돌아갈 곳 없는 이들은 하나같이 밖으로 나선다. ’한국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을까?’에서 예수는 교회가 아니라 거리에 있었다. 변선환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했다가 출교당해 담장 밖으로 쫓겨났다. 정의당은 미래대응기금을 직격하며 원외(院外)에서 원내가 묻지 않는 것을 묻는다. 르 귄의 오멜라스도 그렇다. 한 아이의 고통 위에 세운 그 풍요로운 도시를 대부분은 받아들이고 산다. 그러나 몇몇은 그 안락을 등지고 말없이 성문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반도체 호황이라는 열차에 올라탄 자와 바깥으로 치여난 자를 가르는 글도, 결국 같은 담장의 안과 밖을 이야기한다. 누구는 쫓겨났고 누구는 제 발로 나왔다. 그러나 나선 것은 같다.

그렇다면 떠나기만 해서 될 일인가. 돌아갈 곳이 없어 모두가 밀려나거나 걸어나가야 하는 이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 물음의 답을 여기서 내릴 순 없다. 다만 이번 호를 이 하나의 흐름으로 함께 읽는 일이, 그 답을 찾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최상희

도모 집필위원. 현 정의당 강원도당 사무처장,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

강원도 춘천에서 지역운동, 지역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다.

댓글